현재 우울증을 설명하는 가장 대표적인 심리학적 이론은 Beck에 의해 제시된 인지이론이다. Beck은 원래 정신분석적 입장을 지니고 있었으며 우울증이 '자기에게로 향해진 분노'라는 정신분석적 가정을 입증하기 위하여 1960년부터 우울증 환자의 꿈, 상상, 자유연상, 사고내용을 조사하였다. 그러나 조사결과, 우울증 환자들의 사고내용에는 분노에 대한 주제보다는 좌절, 실패, 자기부정, 절망 등과 같은 주제의 부정적 사고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러한 발견으로 인해, Beck은 정신분석적 설명에 대한 회의를 갖게 되었다. 이후 그는 새로운 관점에서 우울증 환자의 사고과정을 면밀하게 연구하였고 그 결과 우울증에 대한 인지이론을 개발하게 되었다.
인지이론에 따르면, 우울증을 유발하는 일차적인 요인은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생각이다. 우울한 사람들의 내면세계를 자세히 조사해 보면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생각이 만연되어 있다. 이러한 부정적인 생각이 기분을 우울하게 할 뿐만 아니라 부적응적 행동을 초래한다. 우울한 사람들이 지니는 부정적인 사고과정은 흔히 자신에게 잘 자각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부정적 생각들이 재빨리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가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고내용보다는 그 결과로 나타나는 우울한 기분만이 느껴지게 된다. 물론 자신의 사고과정에 의식적으로 주의를 기울이면 사고내용이 자각될 수 있다. 그러나 복잡한 행동도 자꾸 반복하면 습관화되어 의식적 자각 없이 자동적으로 진행되어 흘러가게 된다. Beck은 이러한 사고과정을 매우 중요하게 여겨 자동적 사고라고 지칭했다.
우울한 사람들이 지니는 부정적인 자동적 사고를 분석해 보면 그 내용이 크게 세 가지 주제로 나누어진다. 즉 우울한 사람들은 자기 자신, 자신의 미래, 주변 환경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독특한 사고방식을 많이 지니고 있다.
첫째, 우울한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많이 지니고 있다. '나는 열등하다', '나는 무가치하다', '나는 사랑받지 못할 사람이다', '나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았다' 등의 부정적인 생각을 지닌다. 둘째, 우울한 사람들은 자신의 미래에 대한 부정적 생각들을 지니고 있다. '나의 미래는 비관적이고 암담하다', '내가 어떤 노력을 하더라도 이 어려운 상황은 개선될 수 없다', '앞으로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되고 나의 심리적 고통은 점점 더 커질 것이다' 등의 생각이다. 마지막으로, 주변 환경에 대한 부정적 생각들을 지니고 있다. '내가 처한 상황은 너무 열악하다', '이 세상은 살아가기에 너무 힘들다', '주변 사람들은 너무 이기적이고 경쟁적이며 적대적이다', '나를 이해하고 도와줄 사람이 없다', '다들 나에게 무관심하거나 나를 무시하고 비난할 것이다' 등의 생각을 하게 된다. 세상에 대한 부정적 생각은 우울한 사람들이 타인에게 적극적인 도움을 요청하지 않고 사회적으로 위축되어 고립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그렇다면 우울한 사람들이 부정적인 사고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들이 어떻게 현실을 부정적인 방향으로 왜곡하는가? 이러한 물음에 Beck의 설명은 우울증 환자들이 인지적 오류를 범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인지적 오류란 생활사건의 의미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흔히 범하게 되는 논리적 잘못을 뜻한다.
인지적 오류의 유형
흑백논리적 사고는 생활사건의 의미를 이분법적인 범주 중의 하나로 해석하는 오류를 말하며 이분법적 사고라고 불리기도 한다. 예를 들어, 타인의 반응을 '나를 좋아하고 있는가' 아니면 '나를 싫어하고 있는가'의 둘 중의 하나로 해석하며 그 중간의 의미를 생각하지 못하는 경우이다. 자신의 성취에 대해서 '성공' 아니면 '실패'로 판정하며 대인관계에서는 '나를 받아들이는가' 아니면 '나를 거부하는가', '내편인가' 아니면 '상대편 또는 적인가' 등의 흑백논리적으로 판단하며 회색지대를 생각하지 못하는 경우이다.
과잉일반화는 한두 번의 사건에 근거하여 일반적인 결론을 내리고 무관한 상황에도 그 결론을 적용시키는 오류이다. 예를 들어, 이성으로부터 두세 번의 거부를 당한 남학생이 자신감을 잃고 "나는 '항상', '누구에게나' '어떻게 행동하든지' 거부를 당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나친 일반화라고 할 수 있다. 시험이나 사업에 몇 번 실패한 사람이 "나는 어떤 시험(또는 사업)이든 나의 노력과 상황변화에 상관없이 또 실패하게 될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이에 해당한다. 대인관계에서 타인으로부터 비난을 당하고 나서 '모든 사람들은 '항상' '어떤 상황에서나' '적대적이고 공격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정신적 여과(mental filtering)는 어떤 상황에서 일어난 여러 가지 일 중에서 일부만을 뽑아 내어 상황전체를 판단하는 오류이다. 예를 들어, 친구와의 대화에서 주된 대화내용이 긍정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친구의 몇 마디 부정적인 내용에 근거하여 '그 녀석은 나를 비판했다' '그 녀석은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사건의 주된 내용은 무시하고 특정한 일부의 정보에만 주의를 기울여 전체의 의미를 해석하는 것을 말한다.
의미확대와 의미축소는 어떤 사건의 의미나 중요성을 실제보다 지나치게 확대하거나 축소하는 오류를 말한다. 우울한 사람들은 부정적인 일의 의미는 크게 확대하고 긍정적인 일의 의미는 축소하는 잘못을 범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친구가 자신에게 한 칭찬은 듣기 좋으라고 지나가는 말로 한 이야기라고 그 중요성을 축소하여 해석하는 반면, 친구가 자신에게 한 비판에 대해서는 평소 친구의 속마음을 드러낸 중요한 사건이라고 확대하여 받아들이는 경우이다. 또 자신의 단점이나 약점은 매우 중요한 것으로 걱정하면서 자신의 장점이나 강점을 별 것 아닌 것으로 과소평가하는 경우가 이러한 오류에 속한다. 때로 이런 경향성은 자신을 평가할 때와 타인을 평가할 때 적용하는 기준을 달리하는 이중기준의 오류로 나타날 수 있다. 예를 들어,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는 매우 엄격하고 까다로운 기준을 적용하여 큰 잘못을 한 것으로 크게 자책하는 반면, 타인이 행한 같은 잘못에 대해서는 매우 관대하고 후한 기준을 적용하여 별 잘못이 아닌 것으로 평가하는 것을 말한다.
개인화는 자신과 무고나한 사건을 자신과 관련된 것으로 잘못 해석하는 오류를 말한다. 예를 들어, D군이 도서관 앞을 지나가는데 마침 도서관 앞 벤치에 앉아서 이야기 중이던 학생들이 크게 웃었다. 사실 이들은 자신들의 이야기 때문에 웃은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을 보고 웃었다고 D군이 생각한다면 이는 개인화의 오류를 범한 것이다.
잘못된 명명(mislabelling)은 사람의 특성이나 행위를 기술할 때 과장되거나 부적절한 명칭을 사용하여 기술하는 오류이다. 예를 들어, '나는 실패자다', '나는 인간쓰레기다', 라고 부정적인 명칭을 자신에게 부과하는 것이다. Bandura에 의하면, 인간은 자기가 선정한 기대에 스스로 자신의 행동을 맞추어 가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이를 그는 자기이행적 예언이라고 불렀다. 즉 자신을 '실패자'라고 규정하는 사람은 미래의 상황에서도 자신이 실패자로 행동할 것이라고 예측하게 되고 따라서 실제 상황에서 그렇게 실패자처럼 행동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외에도 충분한 근거 없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추측하고 단정하는 독심술, 충분한 근거 없이 미래에 일어날 일을 단정하고 확신하는 예언자적 오류, 충분한 근거가 없이 막연히 느껴지는 감정에 근거하여 결론을 내리는 감정적 추리 등이 있다.
이러한 인지적 오류의 특징은 충분한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지적 오류로 인해서 현실을 실제보다 부정적으로 왜곡하고 과장하여 해석하게 되는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겪게 되는 크고 작은 생활사건들의 의미를 해석할 때 이러한 인지적 오류를 자주 범하게 되면, 부정적인 생각을 많이 지닐 수밖에 없고 그 결과 심리적 고통이 가중되어 우울증으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인지적 오류를 많이 범하는 사람들은 편향된 인식의 틀, 즉 독특한 인지도식을 지니고 있다. 인지도식(schema)은 과거경험을 추상화한 기억체계로서 생활 속에서 경험하는 사건들의 다양한 정보를 선택하고 사건의 의미를 해석하며 미래의 결과를 예상하는 인지적 구조를 의미한다. 동일한 생활사건의 의미를 사람마다 다르게 해석하는 이유는 인지도식이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지도식은 어린 시절의 경험에 의해 형성되며 부정적인 생활사건에 직면하게 되면 활성화되어 그 사건의 의미를 부정적으로 왜곡함으로써 우울증상을 유발한다는 것이 인지이론의 골자이다.
인지도식의 내용은 역기능적 신념의 형태로 나타난다. Beck에 따르면 우울한 사람들은 자신과 세상에 대해서 완벽주의적이고 당위적이며 융통성이 없는 경직된 신념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신념은 '......해야 한다.' 또는 '......해서는 안 된다.'라는 당위적 명제의 형태를 지니며 현실적인 삶 속에서 실현되기 어려운 것으로서 흔히 좌절과 실패를 초래하기 때문에 역기능적 신념(dysfunctional belief)이라고 불린다. 우울증을 유발하는 역기능적 신념은 크게 사회적 의존성과 자율성이라는 두 가지 주제의 신념들로 구성된다. 사회적 의존성은 타인의 인정과 애정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경향성을 의미하며, 이와 관련된 역기능적 신념의 예로는 '나는 주변의 모든 중요한 사람들로부터 사랑과 인정을 받아야 한다', '다른 사람의 사랑과 인정 없이 나는 행복해 질 수 없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결코 미움을 받아서는 안 된다' 등이 있다. 반면 자율성(autonomy)은 개인의 독립성과 성취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경향성을 의미하며, 이와 관련된 역기능적 신념에는 '다른 사람에게 종속되거나 지배당해서는 안 된다', '모든 일을 완벽하게 해야 한다. 절대로 실수해서는 안 된다', '다른 사람보다 우월해야 한다', '인간의 가치는 그 사람의 성취에 의해 결정된다' 등이 있다.
사람마다 이러한 두 가지 종류의 역기능적 신념을 지니는 정도가 다르다. 사회적 의존성이 높은 사람은 대인관계와 관련된 부정적 사건 (예: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이혼, 별거, 실연 등)에 의해 우울증이 유발될 수 있는 반면, 자율성이 높은 사람은 독립성과 성취지향적 행동이 위협받는 생활사건(예: 실직, 신체적 질병, 업적부진, 치명적 실수)에 의해 우울증이 유발될 수 있다.
우울증의 인지이론은 기본적으로 취약성ㅡ스트레스 모형에 기초하고 있다. 즉 우울증은 역기능적 신념이라는 취약성과 부정적인 생활사건이라는 스트레스가 함께 존재해야 유발된다고 본다. 역기능적 신념을 많이 지닌 사람에게 부정적 생활사건이 일어나면 그 사건의 의미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인지적 오류가 개입된다. 이러한 오류를 통해 사건의 의미를 과장하거나 왜곡함으로써 부정적인 자동적 사고가 발생하게 되고 그 결과 우울증상으로 발전하게 된다는 것이 Beck이 주장한 인지 이론의 골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크고 작은 생활사건이 일어났을 때 무의식적으로 반응하는 생각들을 좀더 살펴 볼 필요가 있다. 합리적인 생각이 맞는지, 객관적으로 봐도 그런지 점검해 보고 아주 사소한 생각부터 새롭게 쌓아가는 하루가 되길 바란다.
출처 : 현대이상심리학 권석만 저
'맘 건강'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양극성 장애 (0) | 2024.08.06 |
---|---|
우울증의 치료 (0) | 2024.08.05 |
우울증의 원인 (정신분석 이론) (0) | 2024.07.25 |
기분장애 (우울증) (0) | 2024.07.24 |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0) | 2024.07.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