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인 L군은 여자친구인 B양 때문에 요즘 고민이 많다. L군은 7개월 전 미팅을 통해 만나게 된 B양과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나 요즘은 B양과 만나는 것이 점점 부담스럽게 느껴지고 있다.
다른 대학의 학생인 B양은 매우 순종적이고 착하며 L군에게 헌신적이다. 그리고 L군과 만나게 되면 헤어지는 것을 싫어한다. 밤이 너무 깊은 것 같아 L 군이 시계를 보면, B양의 표정은 금방 어두워지며 헤어지기를 아쉬워한다. 내일의 학교생활을 위해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인데도, 조금만 더 있다가 헤어지자는 말에 조금씩 늦추다가 12시를 넘기기가 다반사였다. 처음엔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으나 이런 일이 자주 있게 되자, L군은 다음날 생활에 지장을 받는 일이 많아졌다. 부모의 불화가 심해 가정이 편안치 않은 점은 이해가 되지만, 거의 매일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있어야 한다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또 B양은 수시로 핸드폰을 통해 L군에게 보고 싶다며 만나자고 애원하곤 했다. 옷을 사러 가는데 어떤 옷이 좋을지 골라 달라거나 영어학원에 등록하려고 하는데 어떤 학원이 좋은지 함께 돌아다니자거나 다음 학기에 어떤 과목을 수강해야 할지 도와달라는 등 L군에게 여러 가지 도움을 요청하곤 했다. 만나자는 연락에 L군이 선약이 있어 오늘 만날 수 없다고 하면 금방 B양은 기가 죽은 목소리로 늦은 저녁에도 시간을 낼 수 없느냐며 보고 싶다고 간청했다. 자신에게 의지하며 매달리는 B양을 위해 L군은 가능한 한 시간을 내어 함께 있어 주고 여러 가지 일을 도와주었으나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했다. 이렇게 몇 개월을 지내다 보니 학업에 소홀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학과나 동아리 친구들과도 소원해지게 되었다.
L군은 이렇게 생활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B양과 일주일에 한 번만 만나자고 제안했다. 이러한 L군의 제안에 B양은 자신이 싫어진 거냐며 울먹였다. 자신은 혼자 있으면 너무 허전해서 항상 L군이 보고 싶은데 어떡해야 하느냐며 눈물을 떨어뜨렸다. L군은 B양을 여전히 사랑하고 있지만 지나치게 자신에게 의존하는 B양이 점점 부담스럽게 느껴지고 있다.
1. 주요증상과 임상적 특징
의존성 성격장애는 스스로 독립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과도하게 의존하거나 보호받으려는 행동을 특징적으로 나타내는 성격장애이다. 이러한 성격장애를 지닌 사람은, B양의 경우처럼 의존상대로부터 버림받는 것에 대한 지속적인 불안을 경험하게 되며 지나친 의존행동으로 인해 상대방을 부담스럽게 하여 인간관계를 유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의존상대가 착취적인 사람인 경우에는 일방적으로 이용당하며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게 된다.
의존성 성격장애의 진단기준은 다음과 같다. 보호받고 싶은 과도한 욕구로 인하여 복종적이고 매달리는 행동과 이별에 대한 두려움을 나타낸다. 이러한 성격특성은 생활전반의 다양한 상황에서 나타나고 성인기 초기에 시작되며 다음 중 5개 이상의 항목을 충족시켜야 한다.
1) 타인으로부터의 많은 충고와 보장이 없이는 일상적인 일도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2) 자기 인생의 매우 중요한 영역까지도 떠맡길 수 있는 타인을 필요로 한다.
3) 지지와 칭찬을 상실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타인에게 반대의견을 말하기가 어렵다.
4) 자신의 일을 혼자 시작하거나 수행하기가 어렵다(동기나 활력이 부족해서라기 보다는 판단과 능력에 대한 자신감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5) 타인의 보살핌과 지지를 얻기 위해 무슨 일이든 다 할 수 있다. 심지어 불쾌한 일을 자원해서 하기까지 한다.
6) 혼자 있으면 불안하거나 무기력해지는데, 그 이유는 혼자서 일을 감당할 수 없다는 과장된 두려움을 느끼기 때문이다.
7) 친밀한 관계가 끝났을 때, 필요한 지지와 보호를 얻기 위해 또 다른 사람을 급하게 찾는다.
8) 스스로를 돌봐야 하는 상황에 버려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 비현실적으로 집착한다.
2. 원인과 치료
선천적으로 특정한 신체 조건을 타고난 사람은 부모나 보호자로 하여금 보호반응을 유발하여 의존적 성향이 강화될 수 있다. 예컨대, 선천적으로 허약하고 병치레가 잦은 아이들은 부모의 과잉보호를 유발하며 이러한 경험으로 인해 성장해서도 다른 사람들에게 과도한 보호와 동정을 기대할 수 있다. 의존성 성격장애자는 어린시절에 만성적인 신체질환을 경험한 경우가 많다는 점이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부모의 과잉보호는 의존성 성격장애의 중요한 요인이 된다. 부모에 대한 의존행동은 보상이 주어지고 독립 및 분리에 대해서는 거부당하는 경험이 축적될 경우, 자녀는 타인에 대해 의존적인 반응양식을 발달시키게 된다. 아동의 기질적 요인 (예:신체적 질병이나 이상)으로 인하여 부몸의 과잉보호가 유발되는 경우가 있으나, 부모의 성격적 특성으로 인하여 아동에게 과도한 보호행동을 나타낼 수도 있다. 이때 아동은 자유롭고 싶은 욕구가 계속적으로 좌절당함으로써 심인성 신체적 증상을 나타낼 수도 있다.
정신분석학자인 Abraham은 성격장애를 심리성적 발달단계의 고착현상으로 설명하였으며, 의존성 성격장애는 구강기에 고착된 결과라고 보았다. 구강기 성격은 의존성, 혼자됨에 대한 불안, 비관주의, 수동성, 인내심 부족, 언어적 공격성 등의 특성을 나타낸다.
인지적 입장에서는 의존적 성격장애가 독특한 신념체계와 관련되어 있다고 본다. 즉 의존성 성격장애자는 "나는 근본적으로 무력하고 부적절한 사람이다","나는 혼자서는 세상에 대처할 수 없으며 의지할 사람이 필요하다"라는 기본적 신념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신념은 타인에게 의존하게 만들며 보살핌을 얻는 대가로 자신의 권리나 주장을 포기하게 한다. 따라서 독립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자기주장기술, 문제해결능력, 의사결정능력을 배우지 못하고 의존성이 강화된다. 의존대상을 만족시키는 데 주의를 기울이고 관계를 악화시킬 수 있는 갈등은 회피하게 된다.
의존성 성격장애자는 의존과 독립에 대해서 흑백논리적 사고를 지니고 있다. 이들에게 삶의 방식은 완전히 의존적이거나 아니면 완전히 독립적인 것 중의 하나이며, 독립적인 존재로 혼자 살아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결국 극단적인 의존적 삶을 선택하게 한다. 또한 이들은 자신의 능력에 대해서도 흑백논리적으로 생각하는데, 어떤 일을 매우 잘 하지 못하면 전적으로 잘못한 것으로 판단하여 자신을 무능하고 무력한 존재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그 결과 ,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거나 보살핌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의존성 성격장애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치료는 개인 심리치료이다. 때로는 의존성 성격장애를 지닌 내담자가 우울증이나 불안장애를 수반하기 때문에 항우울제나 항불안제와 같은 약물이 처방될 수 있으나, 이러한 약물은 성격장애를 변화시키거나 치료하는 것은 아니다. 심리치료에서 자신의 의존성을 치료자에게 나타내게 된다. 이러한 의존적인 내담자를 치료하기 위해서 치료자는 내담자와 의존적인 관계를 맺어야 하지만 내담자가 점차로 치료자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 독립적인 사람이 되도록 도와야 한다. 흔히 치료자에게 깊이 의존하여 치료가 종결되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치료종결이 다가오면 오히려 문제가 악화되는 경향을 나타내기도 한다.
의존성 성격장애자에 대한 정신역동적 치료의 목표는 내담자의 의존적 소망을 좌절시키고 내담자가 독립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내담자가 지니고 있는 상실과 독립에 대한 불안을 직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특히 치료자는 전이와 역전이를 유의해야 한다. 내담자는 치료자의 인정을 받기 위해 독립적인 삶으로 변화하고 있는 듯이 나타낼 수 있다. 치료자는 이러한 피상적 변화를 치료효과가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으나 실은 치료자에 대한 의존성이 심화되고 잇는 것일 수 있다. 반면 치료자는 내담자의 의존적 태도에 자신의 자기애적 소망이 촉발되어 내담자와의 의존적 치료관계를 즐기거나 오히려 강화할 수도 있다. 그러나 치료자는 이를 극복해야 하는 동시에 내담자의 의존적 소망을 좌절시킴으로써 유발되는 내담자의 분노와 공격을 적절하게 잘 다룰 수 있어야 한다.
인지행동치료에서는 의존성 성격장애자에 대한 치료목표를 독립에 두기보다는 자율에 둔다. 즉 타인에게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인 삶을 지향하는 것은 이러한 성격장애자에게 매우 힘들고 부담스러운 것이다. 반면 자율은 타인으로부터 독립적으로 행동하는 동시에 타인과 친밀하고 밀접한 인간관계를 유지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를 위해서는 중요한 타인으로부터 좀더 독립적일 수 있도록 자기신뢰와 자기효능감을 증진시키는 것이 필수적이다. 생활 속의 여러 가지 문제들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해결기술이나 의사결정기술을 습득시키고, 자신의 생각을 적절하게 표현하는 자기주장훈련이나 의사소통훈련도 하게 한다. 이러한 능력이 증진됨에 따라 타인에 대한 의존의 필요성이 감소되고 그 결과 자기욕구를 포기하며 순종해야 할 필요성도 감소하게 된다. 아울러 치료자에 대한 내담자의 의존성을 극복할 수 있도록, 점진적으로 내담자가 치료시간을 주도하여 이끌어 나가도록 유도한다. 예컨대, 치료자가 치료와 관련된 여러 가지 사항에 대한 결정, 치료회기에 다룰 주제의 선택, 문제해결방법의 탐색과 결정 등을 내담자에게 위임함으로써 내담자는 치료자로부터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삶의 방식을 배워 나가게 된다.
출처 : 현대이상심리학 권석만 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