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공부하고 있는 20대 중반의 J양은 며칠 전 술에 만취한 상태에서 면도날로 손목을 그어 자살을 시도하였다. 다행히 가족에게 발견되어 목숨을 건졌지만 심하게 우울한 상태이다. 어려서부터 예쁘고 다재다능했던 J양은 주변 사람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으며 자랐다. 그러다 중학교 때 잘생기고 멋있는 국어교사를 매우 좋아하였고 교사 역시 예쁜 여학생을 귀여워했다. J양은 국어교사에 대해 사제관계 이상의 감정을 지니고 집착하게 되었으며, 어린 학생이 애정을 가지고 강렬하게 다가오자 국어교사는 J양을 의도적으로 멀리하게 되었다. 이때 J양은 국어교사에 대해서 강렬한 실망감과 분노를 느꼈으며 자신의 손목을 면도날로 그어 자해를 시도하였다. 결국 국어교사는 이 문제와 관련되어 전근을 가게 되었다. 고등학교 시절에 J양은 과외공부를 지도하던 명문대학교 대학생과 사랑에 빠졌다. J양은 그 대학생 오빠를 이상적인 남성으로 여겼으며 부모에게 거짓말을 하고 밤늦게까지 데이트를 하곤 했다. 그러나 매일 만나주기를 요구하는 J양에게 그 대학생은 부담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만나자는 J양의 요구에 그 대학생이 거절을 하면, J양은 강한 분노를 느끼고 상대방이 모욕감을 느낄 심한 욕설을 퍼부었다. 이때부터 부모 몰래 혼자 술을 마시기 시작했으며 아버지가 소장하고 있는 양주를 밤새 마셔대곤 했다.
J양은 대학에 진학한 후에도 이성관계가 복잡했다. 혼자 있으면 왠지 허전하고 우울했으며 주변에 있는 누군가를 사랑할 때 생기를 느낄 수 있었으나 대부분의 이성관계가 불행하게 끝나곤 했다. 대부분 강렬하게 좋아하다가 사소한 갈등이 계기가 되어 상대방에게 분노를 느끼고 심한 상처를 주고 헤어지는 패턴이 반복되었다. 학부 전공에 불만을 지녔던 J 양은 전공을 바꾸어 다른 대학의 석사과정에 진학했다. 대학원에 진학한 후 J양은 박사과정의 한 남자 선배에게 매혹을 느끼게 되었다. 그 선배는 기혼자였으나 J양은 개의치 않고 강렬한 애정을 표시했고 그 선배는 몹시 주저했으나 J 양의 적극적인 구애에 결국 서로 사랑하는 사이로 발전하였다. 급기야 성관계를 맺게 되었고 J양은 선배에게 자신이든 현재 부인이든 택일을 하라고 압력을 가했다. 아들까지 한 명 두고 있는 그 선배는 결코 가정을 버릴 수 없다고 판단하고 J양에게 관계를 청산하자고 했다. 그날 밤 J양은 술에 만취되어 선배의 집을 찾아가 행패를 부리고 모든 것을 폭로한 후, 집에 돌아와 자살을 시도한 것이다.
1. 주요증상과 임상적 특징
경계선 성격장애(borderline personality disorder)는 강렬한 애정과 분노가 교차하는 불안정한 대인관계를 특징적으로 나타내는 성격장애를 말한다. J양의 경우와 같이, 이 성격장애를 지닌 사람은 심한 충동성을 보이며 자살과 같은 자해적 행동을 반복적으로 나타내는 경향이 있어 때로는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경계선 성격장애의 진단기준은 다음과 같다. 대인관계. 자아상 및 정서의 불안정성과 더불어 심한 충동성이 생활전반에서 나타나야 한다. 이러한 특징적 양상은 성인기 초기에 시작하여 다양한 상황에서 일어나며 다음의 특성 중 5가지 이상의 항목을 충족시켜야 한다.
1) 실제적인 또는 가상적인 유기(버림받음)를 피하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
2) 극단적인 이상화와 평가절하가 특징적으로 반복되는 불안정하고 강렬한 대인관계 양식
3) 정체감 혼란: 자아상이나 자기지각의 불안정성이 심하고 지속적이다.
4) 자신에게 손상을 줄 수 있는 충동성이 적어도 2가지 영역에서 나타남(예: 낭비, 성 관계. 물질 남용, 무모한 운전, 폭식)
5) 반복적인 자살 행동, 자살 시늉, 자살 위협 또는 자해 행동
6) 현저한 기분변화에 따른 정서의 불안정성(예: 간헐적인 심한 불쾌감, 과민성, 불안 등이 흔히 몇 시간 지속되지만 며칠 동안 지속되는 경우는 드묾)
7) 만성적인 공허감
8) 부적절하고 심한 분노를 느끼거나 분노를 조절하기 어렵다.(예: 자주 울화통을 터뜨림, 지속적인 분노, 잦은 육체적 싸움)
9) 스트레스와 관련된 망상적 사고나 심한 해리 증상을 일시적으로 나타낸다.
경계선 성격장애의 가장 큰 특징은 극단적인 심리적 불안정성이다. 사고, 감정, 행동, 대인관계, 자아상을 비롯한 성격전반에서 현저한 불안정성을 나타낸다. 이러한 성격장애를 지닌 사람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타인으로부터 '버림받는 것'이며, 이러한 상황이 예상되면 사고, 감정, 행동에 심한 동요가 일어난다. 흔히 이성을 이상화하여 강렬한 애정을 느끼고 급속하게 연인관계로 발전한다. 그러나 상대방이 자신을 버리고 떠나가는 것을 두려워하여 늘 함께 있어주거나 강렬한 애정의 표현을 요구한다. 이러한 요구가 좌절되면, 상대방을 극단적으로 평가절하하며 강렬한 증오나 경멸을 나타내거나 자해나 자살과 같은 극단적인 행동을 하게 된다.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강렬하지만 불안정한 대인관계의 양상을 나타내게 된다.
경계선(borderline)이란 용어의 기원은 원래 신경증과 정신증의 경계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즉 정신증과 신경증에 속하는 증상을 일부 나타내면서 그 어느 쪽에도 분류하기 어려운 중간집단을 지칭하기 위해서 경계선장애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망상이나 환각과 같은 정신증적 증상을 지속적으로 나타내지는 않으나 일시적으로 현실검증력의 저하를 보이고 충동 및 감정 조절에 심각한 곤란을 나타내는 경우를 경계선 장애라고 지칭하였다.
2. 원인과 치료
정신분석적 입장에서는 경계선 성격장애의 기원을 오이디푸스 갈등 이전의 어린 시절에 어머니와 맺었던 독특한 관계경험에 두고 있다. 경계선 성격장애자들이 유아기의 분리-개별화 단계에서 심한 갈등을 경험하여 이 단계에 고착되어 있다고 설명한다. 이 시기에 아이는 엄마가 사라지는 것에 놀라게 되고 때로는 엄마가 어디에 있는지에 대해서 심하게 걱정하며 극심한 불안 속에서 엄마를 찾기도 한다. 즉 엄마가 사라지고 자신이 버림받게 되는 것에 대한 강렬한 두려움을 경험하는 유아기의 위기를 반복적으로 재경험하는 것이 경계선 성격장애라는 것이다. 이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혼자 있는 것을 참지 못하고 중요한 타인으로부터 버려지는 것을 두려워하게 된다.
분리-개별화 단계에 고착되는 이유는 이 시기에 엄마가 아이에게 안정된 애정을 보여줄 수 없는 여건이었거나 아이가 공격적 특질을 타고나서 엄마와 아이 간에 불안정한 정서적 관계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 아이는 안정되고 통합된 자아상과 엄마상을 내면화하지 못한다. 즉 아이는 분리-개별화 단계에서 엄마의 좋은 면과 나쁜 면을 경험하게 되는데, 이러한 좋은 엄마와 나쁜 엄마가 사실은 동일한 존재라는 것을 수용하지 못한 채 분리의 방어기제를 통해 엄마에 대한 양극적인 표상을 분리하여 지니게 된다. 따라서 때로는 좋은 엄마로 느껴지다가 때로는 나쁜 엄마로 느껴지는 불안정하고 극단적인 감정이 교차되어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불안정한 엄마상은 결국 불안정한 자기상을 초래하게 된다. 정상적인 아이들은 안정되고 통합된 엄마상을 형성함으로써 엄마가 곁에서 사라져도 내면화된 엄마상을 통해서 엄마의 부재로 인한 불안을 이겨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엄마에게 심한 야단을 맞더라도 평소 좋은 엄마에 대한 기억이 통합되어 있기 때문에 극단적인 분노나 불안을 경험하지는 않는다.
경계선 성격장애자들은 흔히 어린 시절에 충격적인 외상을 경험한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72%는 언어적 학대, 46%는 신체적 학대, 26%는 성적 학대, 76%가 부모의 양육태만, 74%가 18세 이전에 부모의 상실이나 이별을 경험했다. 이러한 어린 시절의 충격적 외상경험이 부모나 자신에 대한 긍정적, 부정적 경험을 통합시키지 못한 채 분리, 부인, 투사적 동일시와 같은 방어기제를 사용하게 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인지적 입장에서는 3가지의 독특한 내면적 믿음을 지니고 있다고 본다. 첫쩨는 "세상은 위험하며 악의에 가득 차 있다"는 세상에 대한 부정적인 믿음이다. 두 번째 믿음은 자신에 대한 것으로서 "나는 힘없고 상처받기 쉬운 존재이다"라는 믿음이다. 세번째 믿음은 "나는 원래부터 환영받지 못할 존재이다"라는 생각으로상대방에게 의지하지 못하고 불안정한 관계 속에서 거부와 버림을 받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지니게 된다.
이들이 가장 흔하게 범하는 인지적 오류는 흑백논리적 사고인데, 이러한 잘못된 사고방식으로 인해 극단적이고 강렬한 감정과 행동을 나타내게 된다. 예컨대, 타인을 '천사 아니면 악마'라는 방식으로 평가함으로써 타인을 극단적으로 이상화하거나 아니면 극단적으로 평가절하하게 된다. 다른 사람의 언행을 자신에 대한 '수용 아니면 거부'로 해석하기 때문에 애정과 분노의 강렬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경계선 성격장애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치료방법은 개인 심리치료이다. 그러나 경계선 성격장애자는 심리치료자에게 있어서 악몽 같은 존재라는 말이 있듯이 매우 힘든 치료대상으로 알려져 있다. 왜냐하면 경계선 성격장애자의 강렬하고 불안정한 대인관계 양상이 치료자와의 관계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치료자는 우선 모호하거나 애매한 언행보다는 솔직하고 분명한 태도를 나타냄으로써 내담자가 치료자의 의도를 오해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울러 치료적 관계형성에 주력해야 한다. 그러나 내담자의 자아강도에 따라 신중하게 치료적인 접근을 할 필요가 있다. 자아강도가 약한 경우에는 지지적 또는 표현적 치료가 바람직한 반면, 자아강도가 비교적 강한 경우에는 통찰지향적 치료를 적용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정신역동적 치료에서는 크게 3가지 치료목표를 설정하고 경계선 성격장애자의 치료를 시도한다. 첫째, 내담자의 자아를 강화시켜 불안을 잘 인내하고 충동에 대한 통제력을 향상시키도록 하는 것이다. 둘째 긍정적 내용과 부정적 내용이 분리되어 있는 내담자의 자기표상과 대상표상을 통합시킴으로써 안정된 자기인식과 대인관계를 유도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긍정적이고 지지적인 내면적 표상을 보다 확고하게 강화시킴으로써 중요한 사람과의 분리나 이별을 참아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인지행동치료에서는 치료의 초기에 내담자의 기본적 믿음을 변화시키려 하기보다는 치료적 관계형성에 주력한다. 강한 감정이 개입된 개인적 문제를 다루기 보다는 내담자가 직면하고 있는 구체적인 문제의 해결에 초점을 맞추면서 내담자와의 신뢰형성에 노력한다. 다음 단계에서는 점차적으로 내담자의 흑백논리적 사고를 다루어 간다. 즉 내담자에게 흑백논리적 사고를 자각시키고 이러한 사고방식이 내담자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함께 살펴본다. 아울러 연속선 상에서 사건의 의미를 해석하는 대안적인 사고방식을 소개하면서 흑백논리적 사고와 비교하여 어떤 것이 더 현실적이고 적응적인지를 평가해 보도록 돕는다. 또한 정서적 조절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치료적 작업으로서, 내담자가 경험하는 구체적인 문제상황에서 자신의 정서적 반응을 살펴보게 하고 대안적인 대응방식을 탐색하게 하며 보다 더 적응적인 정서표현 방식을 습득하게 한다. 치료자는 내담자가 표현하고 싶어하는 감정을 수용해 주는 동시에 그러한 감정을 적절하게 표현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내담자의 새로운 정서적 표현방식에 대한 피드백을 제공한다. 마지막 단계에서는 경계선 성격장애자가 지니고 있는 자신과 세상에 대한 부정적인 믿음을 자각하고 보다 긍정적인 믿음으로 변화시키도록 돕는다.
경계선 성격장애자가 정신증적 증상, 자기파괴적 행동 또는 자살 충동을 나타낼 경우에는 단기적인 입원치료가 필요하다. 또한 이들이 나타내는 증상이나 동반하는 장애에 따라서 항우울제나 항불안제와 같은 약물치료가 사용되기도 한다.
출처 : 현대이상심리학 권석만 저